지방의 호족 세력을 통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잃은 궁예는 918년 송악의 호족인 왕건에게 쫓겨났다.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고려라고 짓고 수도를 송악 으로 옮겼다. 고려는 후백제를 공격하는 반면, 신라에는 적극적인 포용 정책을 폈다.

935년 통일신라는 고려에 항복해 전쟁 없이 흡수됐다. 후백제에서는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했으며, 왕건은 936년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했다. 고려는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고 국자감과 향교 등을 세워 수준 높은 교육을 했다. 불교도 번성 하여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토속신앙과 융합된 연등회, 팔관회도 열리는 등 고려는 종교 에서 포용성을 보여줬다.

고려는 중국의 송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와도 활발히 교류했다. 수도인 개성에 들어가는 관문 벽 란도에는 송, 서역과 아라비아, 동남아시아, 일본의 상인들이 빈번히 드나들었다. 송 상인들은 비단과 약재, 고려 상인들은 삼베와 인삼 등을 팔았다. 아랍 지역에선 상아, 수정, 호박 등 보석이 들어왔다. 한국을 ‘코리아’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바로 이 ‘고려’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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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운학문매병 (고려, 12세기), 비취색 청자는 고려 시대를 대표한다. 청자를 빚는 과정에서 표면에 홈을 파내고 희고 검은 흙으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문양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감기법은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기술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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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 인쇄본 ‘직지’(고려, 1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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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는 찬란한 문화를 자랑한다. 비취색 도자기 표면을 파고 무늬를 넣은 ‘상감’ 기법의 상감청자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예술품이다.

8만 1,258장의 나무판에 불교 경전을 조각해 종이에 인쇄한 팔만대장경은 이 시대 불교문화의 정수이자 세계 목판인쇄의 최고봉이다. 또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도 고려인이 발명했다. 한국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고려가 금속인쇄 기술을 발명한 시기는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선다. 현존하는 인쇄물 로는 1377년에 나온 ‘직지’라는 책이 있다. 1455년에 인쇄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보다 78년 이나 앞선 이 책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몽골과의 전쟁

13세기 초 중국의 정세는 급변했다. 유목민인 몽골족이 통일 국가를 이루면서 중국의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몽골은 1231년 1차 침입 이래 7차례나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군인은 물론 백성과 노비 등 일반 민중까지 합세하여 몽골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1259년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이뤄졌으며, 원나라는 고려 왕국의 존속 보장과 몽골군의 즉각 철수 등 고려 측 6개 요구를 모두 수락했다. 이는 고려를 직할 통치하려던 몽골에 끈질기게 항전한 결과였다. 강화는 성립됐으나 몽골에 항쟁하던 군대인 삼별초는 황제를 옹립하고, 진도를 거점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며 전쟁을 계속했다. 진도가 함락되자 제주도로 옮겨가 1273년까지 저항했다.

무려 42년간 당시 세계 최강 제국인 몽골 군대와 맞선 고려의 저항은 강인한 투쟁 정신의 표상 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생은 피폐해졌으며, 황룡사 9층 탑을 비롯한 수 많은 문화유산이 몽골군에게 파괴됐다.